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5·18 민주화운동/전개 (문단 편집) == 사망자는 몇 명인가? == || [[파일:無名투사의 관.jpg|width=330]] || || 희생자가 담긴 관. 관짝에는 당시 희생자의 신원 파악이 불가능하여[* [[5.18 민주화운동/왜곡/북한 개입설]] 문서를 보면. 2000년대 이후에 주민등록의 전산화가 이루어졌으므로. 당시 육안 식별이 대부분이었던 신원 확인 작업 특성상 머리에 총을 맞았거나 시신이 부패한 경우에는 신원 확인이 불가능하여 신원미상으로 남았을 것이다. ] 무명(無名)투사 라 씌어 있다.|| >5.18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관을 구할 수 없었어.''' 학생들이 두꺼운 베니어 판을 구해다가 잘라서 그것으로 관을 만들고, 미처 수의를 못 만드니까 당목으로 둘둘 감아서 태극기 한 장씩을 덮어 갖고 묶고 한 것이 도청 마당으로 하나 가득이여. 나중에는 돈 나올 데가 없으니 관 살 돈도 없제, 당목 살 돈도 없제, 그래 교회에서 우선 30만 원을 얻어서 감당하게 했제. >---- >-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대모로 알려진 광주YWCA 회장 조아라 여사의 증언[* <이야기 여성사: 한국 여성의 역사 1권>. - '조아라: 나는 아직도 광주가 생생합니다 - 광주민주화운동의 대모' p209~210] 5월 31일 계엄사령부가 발표한 공식 피해자는 민간인 144명, 군인 22명, 경찰 4명 등 합계 17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으며, 127명의 민간인, 109명의 군인, 144명의 경찰이 다쳤다고 공식 발표했다. 그러나 이 발표를 믿는 광주 시민들은 아무도 없었으며, 너무 많이 죽어나가 일일이 세는 것조차 힘들었다. 훗날, 5.18 기간 중 오랫동안 집을 떠난 뒤로 실종신고가 접수되지 않은 이들까지 합하면 전체 사망자 수만 '''2천여 명'''에 달할 거라는 얘기도 있었으나 현재 확인할 길은 없다. 5.18 당시 사망자 수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이유는 첫째, 당시 실시 20년이 채 안 된 주민등록제도 시행이 미흡해,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지 않은 분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며, 둘째, 공수부대원들이 사상자 수를 은폐하기 위해 사상자가 나오는 대로 트럭에 싣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 [[암매장]]시켰기 때문이다. 반면 광주에서 [[침례회]] 목사로 일한 아놀드 피터슨은 당시 광주 인구가 75만 명이고, 광주의 각 침례교회에 출석자 2천 명 중 사망자가 2명이었으며, 당시 국군에서 일한 친구가 5.18 희생자를 832명으로 확인했다고 들은 것을 근거로 해 사망자는 무려 '''8백여 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그러나 신군부의 발표에서조차 사망자 수는 점차 늘어났다. 문제는 사망자 수가 아닌 학살 자체를 가벼이 보는 신군부의 태도이다. 당시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7월 22일 외신 기자회견에서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007250020920100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0-07-25&officeId=00020&pageNo=1&printNo=18094&publishType=00020|'''"광주 사태는 다른 나라의 관점에서 보면 '마이애미 폭동' 수준이다"''']]라고 밝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게다가 3월 14일 스포트라이트에 나온 김용장씨의 언급에 따르면 시신의 수와 행불자의 정확한 수를 확인할 수 없는 이유로 병원을 개조해 5월 내내 24시간 풀 가동해서 시체를 소각해버렸기 때문이라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